EMMO의 철학에 기반한 4차원 세계에서 소재는 다른 개체들과 함께 존재합니다

EMMO를 처음 접하면서 방대한 클래스들과 IRI를 공부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좋지 못한 소식은 그 어려움보다 더한 어려움을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다루어 온 소재 데이터의 관점을 잠시 내려놓고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매우 익숙하게 그리고 관습적으로, 우리는 하나의 소재나 시편을 중심에 두는 관점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조성, 공정 조건, 물성값, 측정 결과를 차례로 붙여 나가는 방식을 친밀하게 수용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EMMO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소재를 하나의 레코드로 보는 대신, 시간과 공간 안에서 다른 개체들과 함께 존재하고 변화하며 관계를 맺는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재 레코드 중심의 익숙한 관점

일반적인 소재 데이터 모델링은 대개 하나의 소재나 시편을 중심에 둡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조성, 제조 조건, 물성값, 측정 결과, 이미지, 문헌 정보와 같은 데이터를 붙여 나갑니다. 이같은 방식은 실험 데이터를 정리하거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때 매우 직관적입니다. 하나의 소재 레코드가 있고, 그 레코드에 관련된 값과 설명이 차례로 연결됩니다. 그동안 수많은 연구 데이터베이스가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EMMO가 바라보는 세계는 위와 같은 방식과는 관점이 상당히 다릅니다. EMMO는 특정 소재 개체 하나를 중심에 놓고 나머지 정보를 그 부속물처럼 엮는 데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4차원의 세계 안에서 함께 존재하고, 변화하고, 그리고 서로 관계를 맺는 여러 개체들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합니다.

소재만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것들

EMMO의 세계 안에서는 단지 소재만이 그 중심을 이루는 축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소재가 만들어지고, 처리되고, 측정되고, 해석되는 과정에서는 다양하고 많은 개체들이 함께 등장하며, EMMO는 이들 모두를 관심 있게 조명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원료, 장비, 공정, 공정 조건, 환경, 미세구조, 결함, 계면, 측정 장치, 측정 행위, 측정 결과, 데이터 파일, 수식, 모델, 시뮬레이션 과정, 계산 결과들은 모두 그 세계 안에 포함되어 함께 존재해야만 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단순히 소재와 관련된 정보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실제 물리적 대상이고, 어떤 것은 시간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이며, 어떤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얻어진 관찰 결과입니다. 또 어떤 것은 실제 대상을 직접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나타내기 위한 데이터, 수식, 이미지, 모델과 같은 표현입니다. EMMO에서는 이러한 대상들을 필요에 따라 구별 가능한 개체로 식별하고, 서로 다른 방식의 관계를 맺는 존재로 바라봅니다. 어렵지만, 이 부분이 EMMO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핵심입니다.

한편, 이때 중요한 것은 이렇게 등장하는 많은 항목들을 단순히 연결하기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이 무엇의 부분인지, 무엇이 어떤 과정에 참여했는지, 무엇이 시간적으로 먼저 일어났는지, 무엇이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무엇이 실제 대상을 표현하는 데이터나 기호인지를 구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단지 같은 소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관계가 부분–전체의 관계인지, 공정 참여의 관계인지, 관찰과 표현의 관계인지까지 함께 드러나야 EMMO가 의도하는 의미 있는 연결이 됩니다.

메레오토폴로지: 부분과 연결을 함께 보는 관점

여기서 EMMO의 중요한 기반 중 하나인 메레오토폴로지의 관점이 등장합니다.

메레오토폴로지는 어떤 것이 무엇의 부분인가를 다루는 메레올로지와, 어떤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경계를 공유하거나 접촉하고 있는지를 다루는 토폴로지를 함께 보는 관점입니다. 쉽게 말하면, 개체들이 따로따로 흩어진 점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분이 되고, 경계를 이루고, 맞닿고, 더 큰 전체를 구성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틀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시편은 여러 상, 결정립, 결함, 계면을 부분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결정립은 시편의 부분이면서 동시에 미세구조를 구성하는 요소이고, 계면은 두 결정립이나 두 상이 만나는 경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열처리 공정은 시편, 장비, 분위기, 온도 조건, 시간 조건이 함께 참여하는 과정이며, 측정은 시편과 측정 장비, 측정 조건, 관찰자가 특정한 관계를 맺는 또 다른 과정입니다.

단순한 소유 관계가 아닌 부분–전체 관계

따라서 EMMO에서 부분–전체 관계는 단순한 데이터 소유 관계가 아닙니다. 이 측정 값이 이 소재 레코드에 속한다는 식의 기계적 연결 또는 데이터베이스 상에서 관습처럼 정의되는 포함 관계,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EMMO에서 묻고자 하는 것은 실제 세계에서 어떤 개체가 다른 개체의 물리적 부분인지, 어떤 개체들이 서로 경계를 공유하는지, 어떤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지, 그리고 어떤 상태가 더 긴 시간적 변화의 한 국면으로 이해될 수 있는 지,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차전지를 예로 들어본다면, 전극을 하나의 소재 개체로만 보면, 활물질, 바인더, 도전재, 집전체, 기공 구조, 계면은 모두 전극을 구성하는 부차적인 속성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메레오토폴로지의 관점에서, 이들은 단순한 하위 속성이 아니라, 전극이라는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이거나 서로 간에 접촉하고 경계를 이루는 개체들로 구별하여 이해되어야 합니다. 활물질 입자는 전극층의 부분일 수 있고, 전극층은 전극의 부분일 수 있으며, 활물질과 전해질이 만나는 계면은 전기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중요한 경계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부분–전체 관계는 공간적인 구성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EMMO가 4차원적 관점을 가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간에 따른 부분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제조 전의 시편, 열처리 중의 시편, 측정 시점의 시편, 사용 후 열화된 시편은 (당연히) 서로 무관한 대상들이 아니지만, 반대로 완전히 동일한 상태의 대상도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의 시편이 시간 속에서 지나가는 서로 다른 국면이거나, 시편의 전체 생애를 이루는 시간적 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구별 가능한 개체는 각자의 맥락에서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 각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시편은 제조 공정에서는 산출물이거나 처리 대상이지만, 측정 과정에서는 관찰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측정 장비는 측정 과정에서는 참여자이지만, 장비 보정 과정에서는 그 자체가 분석 대상이 됩니다. 데이터는 측정 결과의 표현이지만, 모델 학습 과정에서는 입력 데이터가 되고, 논문이나 데이터베이스 안에서는 다시 다른 연구자들이 해석해야 할 지식 자원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개체는 어떤 관계에서는 주인공이 되고, 다른 관계에서는 다른 개체를 설명하는 조연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의 개체를 항상 중심에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맥락에 따라 중심이 이동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EMMO는 바로 이처럼 여러 개체가 각자의 위치에서 세계를 구성하고, 서로의 부분이 되거나, 과정에 참여하거나, 대상을 표현하면서 하나의 의미 있는 구조를 이루는 방식을 다루고자 합니다.

복잡성을 없애지 않고 이해 가능하게 만들기

EMMO는 이러한 복잡성이 그저 임의적인 링크들의 집합에 그치도록 하지는 않습니다. 소재, 공정, 측정, 데이터, 모델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관계가 부분–전체 관계인지, 접촉이나 경계의 관계인지, 과정 참여 관계인지, 시간적 선후관계인지, 인과적 연결인지, 실제 대상과 표현 사이의 관계인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열처리 조건이 시편의 결정립 크기와 관련된다”는 문장은 겉으로 보이는 단순한 연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EMMO의 관점에서는 이 연결을 더욱 세밀하게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열처리는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이고, 시편은 그 과정에 참여한 물리적 대상이며, 온도와 시간은 그 과정의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결정립 크기는 열처리 이후 시편의 미세구조와 관련된 특성이며, 그 값은 다시 특정한 측정 과정과 데이터 표현을 통해 얻어진 결과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소재 지식은 실제로는 여러 개체와 관계가 겹쳐져 만들어지며, 중요한 것은 그런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공정은 대상을 변화시키고, 측정은 변화된 대상을 관찰하며, 데이터는 관찰 결과를 기록하고, 모델은 그 현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예측합니다. EMMO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일차원적인 설명으로 압축하지 않고, 각각의 역할과 관계를 구별하여 표현하려고 합니다.

EMMO는 복잡성을 가능한 한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정리하는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많은 노드를 만들고 많은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각 연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하여 정밀한 해석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매우 세부적인 구조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소재를 설명하는 거대한 테이블을 구성하는 기존의 RDB/MS 방식에서는 많은 정보가 하나의 레코드 주변에 모이는 구조를 형성하게 됩니다. EMMO에서는 소재가 만들어지고, 변하고, 측정되고, 데이터와 모델로 표현되는 세계 전체를 작은 개체와 관계의 네트워크로 재구성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소재를 중심에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맥락을 더 넓게 열어 보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EMMO의 유연성은 아무 관계나 자유롭게 연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복잡한 관계를 표현하되, 그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잃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체계입니다. 그래서 EMMO는 소재 데이터의 복잡성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한 채로, 서로 다른 데이터와 지식을 연결할 수 있게 해주는, 전체 의미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재 데이터가 지식이 되는 방식

EMMO를 활용한다는 것은 방대한 최상위 온톨로지의 모든 개념을 그저 공부하고 활용하면 된다는 차원에서 는 확실히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소재 연구자가 이미 다루고 있는 시편, 공정, 측정, 물성, 데이터, 모델의 의미를 다시 묻고, 이들이 세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관계 맺는지를 정리하는 일을 밀도 있게 수행해야 합니다.

정리하면, EMMO의 철학에서, 우리는 관심있는 소재 그 자체의 데이터에 연관되는 더 많은 항목을 단순히 붙여 나가는 방식의 기존의 형태를 지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공간 모두가 축이 되는 4차원적 관점에서, 소재 데이터가 실질적으로 유용한 지식이 되는 과정을 상세하고 엄밀하게 바라보게 하는 세계적 렌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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